옛 생각이 난다. 취미는 짝사랑이요 특기는 훔쳐보기였던, 키가 170이 채 되지 않았지만 몸무게는 학교 최고수준이었던 고도비만 소년, 십수년전의 나.(지금의 키는 180. 중 3때 이후로 170을 넘겼던 것 같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쉬는 시간엔 무얼하는지, 방과 후엔 어떤 경로로 집에 가는지 훔쳐보며 괜히 마음 졸였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같으면 스토커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싶은데, 생각해보면 왜 그런 무식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무서웠겠지. 먼저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알고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아이가 아닐른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을게다. 지금도 나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분명히 그 기간이 줄었다. 어느 정도 바라보다 뻔뻔하게 고백도 하고, 사귀다 아닌 것 같으면 고백을 했던 순간의 설레임을 새까맣게
영화 좀 본다는 많은 이들에게 만장일치에 가깝운 호평을 받고 있는 <렛 미 인>은 예술 영화도, 그렇다고 이른바 '영리한 대중영화'도 아니다. <렛 미 인>은 소년과 소녀에 대한 동화다. 무심코 바라보다가 결국 놀라게 되는 순수에 대한, 우리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굳이 말하자면 '장르의 독창적 변용'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설득당해도 좋을 만큼 순수하고 환호를 지를만큼 즐겁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고 있는 얘기가 많아서? 담고 있는 것들이 차고 넘쳐서? 아니다. 그것은 나의 문제다. 감독에게 돌려야 할 공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여 그것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려준 세심한 배려에 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금방 또 웃다보면 결국엔 환호를 지르게 된다. 잉마르 베르히만 외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스웨덴에서 날아온 이 영화는 28살 먹고 설날 아침에 받은 세뱃돈 같은 영화다. 기대도 안했는데 봉투가 두둑하다.
12살 소년 오스칼은 건드리면 부서질 것 처럼 생긴 주제에 왕따씩이나 당하는 심약한 소년이다. 할 수 있는 복수라고는 신문에 난 살인사건을 스크랩하며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을 저주하거나, 아무도 없는 집 앞 놀이터에서 칼을 휘두르며 자신이 들었던 모욕적인 언사를 허공에 뿌리는 것 뿐이다. 거기서 오스칼은 이엘리를 만난다. 이혼한 부모와 힘든 환경 덕에 12살 아이라면 당연한 호기심 조차 없이 서로를 경계하는 그들은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계속 되면서 오스칼은 어쩔 수 없이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비록 빛이 사라진 후에 만이라도, 그의 곁에 있으주는 이는 이엘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치 않기에 사랑하는 법 또한 생경한 오스칼은 모르스 부호를 익혀 벽을 통해 이엘리와 대화를 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탕을 사주는 행위로 마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엘리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겁이난다. '네가 너무 좋아'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는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내가 인간 여자가 아니라고 해도?' 라며 반문한다. 그래도 좋아죽겠다는 오스칼. 누군갈 처음으로 좋아해본 그에게 이엘리는 한 줄기 빛이었을까. 그녀가 뱀파이어라 해도.
영화는 오스칼의 이야기와 이엘리의 이야기를 균형있게 보여준다. 오스칼의 학교 시퀀스가 있으면 이엘리의 흡혈 시퀀스가 있고 이혼한 부모의 이야기가 있으면 이엘리의 아빠(라 부르는 연인?)의 이야기가 있다. 오스칼의 성장이야기와 이엘리의 흡혈귀로서의 삶을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기본 구조다. 이 둘이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엮이면서 분리되어 있던 두 개의 다른 인생이 서로의 삶에 침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심약한 왕따 소년과 몇 세기를 살아온 강인한 뱀파이어 소녀의 삶이 포개어졌을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말만 들어도 비극적 냄새를 풍기는 이런 상황이다. 영화는 그에 따라 몇 명의 희생자를 내고, 이엘리에 대한 오스칼의 불신 혹은 의심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Let the right one in>은 '들어가도 될까?'라는 허락을 구하는 표현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장르적 속성에(빛에 닿으면 불타버린다든가,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든가...) 영화가 추가한 속성인 '인간이 초대하지 않은 장소에 들어가면 피가 역류한다'는 설정을 통해 오스칼의 남성으로서의 본능, 즉 연애 관계에 있어서 어떤 확인을 하려는 습성을 얄밉게 보여준다. 이내 울면서 들어와를 읊조리는 오스칼을 보면서 나는 안심한다. 그래. 그래봤자 12살인데. 그런 오스칼을 바라보는 이엘리의 깊은 눈은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다. 정작 잘 못한 것은 오스칼인데, 미안하다는 듯이. 12살짜리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으로. 이렇게 이야기는 균형을 유지한다. 사람을 죽여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아도, 얼굴에 염산을 부어도, 녹아내린 얼굴을 한 남자가 건물에서 떨어져도. 관객에게 남는 것은 이들의 순수한 우정과 사랑에 대한 것 뿐이다.
큐브로 여자를 꼬시는 의외의 대범함을 보여주는 오스칼 소년
그래서 영화의 감독인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재능을 높이 살 수 밖에 없다. 욘 린퀴비스트의 원작 소설에서는 영화보다 자극적인 묘사가 많았다고 한다. 왕따에 대한 묘사는 더욱 노골적이고 적나라 했으며 이엘리의 아빠(혹은 연인?)은 소아 성애자로 묘사된다고 한다.(영화에서도 암시가 되고 있긴 하다.) 게다가 이엘리는 양성애자의 모습도 띈다고 하니 그대로 영화화 됐다면 좀 더 본격적인 B-무비의 감수성을 가지고 만들어졌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하지만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손은 이 영화의 방점을 어디에 찍을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원작 소설의 여러 장치 속에서도 그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이야기에 감응 한 것이다. 그는 소설의 뼈대를 살리고 비중을 재배치 해 원작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파스텔 톤이지만 밋밋한 색감과 넘치는 빛, 지극히 드라이한 편집과 촬영, 그리고 소리의 예민한 활용은 자극적인 장면이 적지 않은 영화의 감정을 냉정하게 컨트롤한다. 그것은 이 영화의 관심이 이엘리의 흡혈 생활이나 오스칼의 성장이 아닌 그 둘이 포개어 지는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단언컨데 재미는 더 있을지 몰라도 영화가 가진 아름다움을 결코 따라오지 못 할 것이라 확신한다.(곧 번역되어 들어올테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Happily ever after.,..' 라는 식의 동화적 사족으로 봐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퀀스가 정말 좋은데, 기껏 성장한 오스칼이 다시 퇴행하지 않도록, 결국 이엘리가 그에게 구원으로 다가오는 것을 형상화 했기 때문이다. 이기도 하고, 또한 그 비주얼이 너무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목이 날아가고 팔이 떨어지면서 확인되는 사랑과 성장의 은유는 그들이 기차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 했을 때, 그때는 그 전과는 다른 이들이 되어있을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앞길에 지옥이 펼쳐져 있다 한들, 손가락으로 가방을 긁는 오스칼의 무표정한 행복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어느새 곧 삼십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순수함 같은 것은 어느샌가 유치함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었나보다. <렛 미 인>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진짜 '재미있는' 영화 였다. 동시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곤 조금 슬퍼졌다. 만일 언젠가 내게 그런 순수가 다시 돌아 온다면, 나는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락했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다. 나는 타락하지 않았다. 단지 순수한 30대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을 뿐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는 그렇다는 것을 말이다.